동역자이야기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 정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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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6-06-2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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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두 살 되던 해, 사촌언니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소안도라는 작은 섬에서 배를 타고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섬에서의 삶은 늘 바람과 파도와 함께였고, 배가 뜨지 못하면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교회로 부르셨고, 어린 마음에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

지금의 원로목사님이신 박석오 목사님의 사모님과는 그 시절부터 언니, 동생 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어린 시절의 교회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말씀과 기도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함께 예배드리며 자라났던 시간들은 지금까지도 내 신앙의 뿌리가 되어 주고 있다.

세월이 흘러 원로목사님과 사모님께서 강진으로 오셔서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께서 총각 집사로 계시던 지금의 장로님을 소개해 주셨다. 결혼 전, 장로님의 얼굴을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와, 성질 있어 보이지 않고 순진해 보이던 첫인상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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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임직식이 있던 날, 바람이 몹시 불어 배가 뜨지 못했고, 결국 제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두 번의 만남 이후 우리는 약혼을 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사람의 계산이나 계획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1976년 4월 6일 월요일, 선교사가 지은 낡은 교회 건물에서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화려한 예식도,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드린 그 서약은 지금까지 나의 삶을 붙들어 주는 기둥이 되었다. 이후 우리는 강남교회를 섬기며 세 자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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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교회에는 피아노가 없었고, 풍금 하나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어느 날 장로님과 함께 우리 교회에도 언젠가는 피아노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우리는 남의 작은 방에 얹혀 사는 처지였고, 가진 것도 많지 않았다.

그때 아들 승배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가입해 두었던 교육보험이 만기를 앞두고 있었고, 장로님 역시 총각 시절 들어 두었던 보험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오랜 고민 끝에, 1987년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교육보험을 해약하기로 결단하였다. 마침 은혜집회가 있었고, 그 집회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함께 그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헌신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의 삶에서 한 번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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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님은 오토바이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리 집 한 칸을 빌려 커피자판기 대리점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 일을 못하게 되었다며 장로님에게 떠맡기듯 부탁하고 떠났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우리의 삶을 안정시키셨다. 그 덕분에 세 자녀 모두를 대학에 보내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세 명을 대학에 보냈다”는 고백이 꿈처럼 느껴진다.

또한 교회가 리모델링을 한 후 오래된 의자들이 좀먹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침 내가 권사로 취임하던 시기였고, 큰딸의 마음까지 더해져 교회 의자를 새롭게 바꾸게 되었다. 교회 십자가 탑이 큰 바람에 무너졌을 때에도 다시 십자가를 세우는 일에 마음을 모았다. 그 모든 순간마다 우리는 여전히 넉넉하지 않았지만, 교회는 늘 우리의 삶보다 앞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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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승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 이후 성적이 계속 상위권을 유지하게 되었고, 선생님의 권유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11월 말, 광주로 전학을 갔고, 둘째 딸 은주는 중학교 2학년이었음에도 함께 자취를 하며 동생의 도시락을 싸 주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삶이었지만, 불평 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아들은 광주에서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수능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 소재 대학교에 합격하였다. 이후 캐나다 연수까지 다녀오며 길이 열렸다. 그의 삶은 한 번도 막힘없이 이어졌다.

아들은 힘겨운 취업경쟁에서 본인이 원하던 농협에 합격하였고, 해남에서의 첫 근무를 시작으로 인천과 서울을 거치며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이어갔고, 농협중앙회 기획실에서 근무하다가 영어와 프랑스어 시험을 거쳐 프랑스로 파견되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또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십일조를 보내오며 강남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역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사람의 능력이나 계획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2014년, 아들이 서른네 살이 되던 해 결혼을 하였고 두 딸을 낳았다. 그리고 2026년, 어린 시절 함께 자취하며 도시락을 싸 주었던 둘째 누나와 함께 우리 부부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세 장의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어 9박 10일 동안 아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시간을 보내며 나는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때 내게 교육보험은 아들의 미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내려놓고 예배를 위한 피아노를 드리게 하셨다. 그 일은 단지 물질을 드린 사건이 아니었다. 아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성령의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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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인생을 책임져 주셨다. 우리는 비워 드렸고, 하나님은 채워 주셨다. 우리가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은 더 크고 깊은 것으로 채워 주셨다.

나는 섬에서 자라 배를 타고 교회에 다니던 아이였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많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60년 신앙의 세월 동안 나는 한 번도 홀로 걸은 적이 없었다. 눈물의 순간마다, 선택의 갈림길마다 하나님은 늘 앞서 가 계셨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나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나의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지심이다.

오늘도 나는 고백하며 찬양한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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