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His story--아들 이야기 / 김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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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55회 작성일 25-08-14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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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도 시대에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아이를 적게 낳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나는 그보다도 더 적게 아들 하나만 낳았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고등학교 때 교회 다니는 것을 등한시했고, 후에 직장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다시 교회를 찾았습니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했지요. 그래서 아들은 어려서부터 손을 잡고 교회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이가 순하고 착해서 교회에 가서 의자에 앉으면 예배가 끝날 때까지 보채지 않고, 돌아다니지도 않고, 꼭 내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목이 마르거나, 쉬를 하고 싶을 때만 자리에서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혼자 교회에 보냈습니다. 교회는 언덕 위에 있었고, 우리 집은 얼마 전 이사를 했는데, 아들은 전에 살던 곳으로 내려와서 집을 못 찾고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오지 않아서 교회에 가보니 이미 아이들은 집에 다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온 동네를 헤매고 찾아다녔습니다.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며 엉엉 울었습니다.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더니, 그곳에 담임 선생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길에서 울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경찰서에 데려다주었고, 학교와 학년, 반을 말하니까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했고, 담임 선생님이 예배를 드리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오셨다는 겁니다.

그 후에 길을 건너지 않는 교회로 옮겼습니다. 오전 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잘 나가고, 점심 후에 오후 예배에도 잘 가더니, 하루는 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길래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마침 선생님과 함께 가는 아들을 만났는데, 주일에 결석한 아이들 집을 선생님과 같이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하도 착실해서 선생님이 같이 다니자고 했답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집에서 걱정하는 것도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내가 「한국시각장애인복지회관」에 자원봉사를 하러 다닐 때, 아들은 내 자전거 뒤에 타고 같이 다녔습니다. 자원봉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후에 복지회관에서 컴퓨터로 하는 업무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때쯤인가, 나는 신문 배달을 1년 정도 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 몰래 헌금을 하는 일도 쉽지가 않아서, 헌금하려고 신문 배달을 하여 작은 적금을 들었는데, 그 적금이 만기가 되니까 내 마음이 두 갈래로 갈렸습니다. 아들에게 내 마음을 말했더니, 단번에 하는 말이 ‘엄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고 싶어요?’(사도행전 5:1-11) 하는 겁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적금 탄 돈 전액을 헌금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학생회 수련회를 간다고, 하루만 갔다 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아빠에게 말했다가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아빠는 ‘그 교회는 고3도 없냐?’며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석유통을 들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당기려고 했습니다. 차라리 수련회에 하루쯤 보내 주는 것이 아들에게 상처가 덜 되었을 텐데. 이렇게 난리를 치르니 아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더 아픕니다. 그때 아들과 둘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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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학과를 정할 때, 생물학과는 [진화론]을 인정하고 [창조론]을 부인하기 때문에 절대로 가기 싫다며, 컴퓨터공학과를 택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는 여름 방학이면 내가 다니는 작은 개척교회에 와서 여름 성경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때 여자 청년들만 있을 때인지라, 아들이 와서 함께해 주니 모두들 힘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으실 때 책을 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는 책 원고를 아들에게 주셨는데, 날짜도 촉박하고 손볼 것도 많은지라 며칠 밤을 아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 원고를 다 정리하여 출력까지 하여 시간 내에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우리 아파트가 성당 바로 앞에 있었는데,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성당의 첨탑이 보였고, 드나드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성당에 다니면 같이 다니겠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선뜻 대답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는데, 아들은 펄쩍 뛰면서 아빠도 말만 그렇지 성당에도 안 갈 것이며, 엄마도 성당은 안 된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 남편과 함께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엉뚱한 방법으로 와전된 것이죠.

결혼할 나이가 가까웠을 때, ‘너는 꼭 믿는 사람과 사귀어라.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라고 말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가 한창일 때, 아들은 누구랑 사귀는지, 매일 전화로 통화하고, 둘이 만나서 광화문에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러 가곤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친구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네가 좋아하면 결혼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다음 해에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며느리는 결혼 후부터 아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성가대와 여선교회 회장도 하며, 아이들을 믿음으로 잘 키우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들도 안수집사를 받았으며, 손녀들도 유아세례부터 시작하여 신앙 안에서 잘 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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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들도 50이 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큰소리로 야단칠 만한 잘못을 한 적이 없으며, 담배는 물론 술 한잔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의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따로 신앙적 교육을 별도로 시킨 것은 없다고 봅니다. 가끔 힘들고 어려울 때 둘이서 예배드린 적이 있고, 함께 울면서 손을 맞잡고 기도한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잘 받은 것 같습니다. 초등 3년부터 다니던 교회가 성내제일교회(합동측)였고, 지금은 올림픽공원 앞에 있는 창대교회입니다. 그래서 따로 말하지 않아도 주일학교 때부터 예배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믿는 친구들과 어울린 것이 믿음의 큰 힘이 된 듯합니다.

우리 강남교회의 다음세대들을 보며, 미래를 내다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이 아이들이 새 시대를 이끌어갈 주인공이 되리라는 기대를 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다음 세대 아이들의 이야기 [His story]는 강남교회의 역사 [History]가 되고, 한국교회의 History가 되며, 하나님의 History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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