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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작은교회, 큰 이야기 - 길이 없는 곳에 길이 되는 교회 / 안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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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51회 작성일 25-08-14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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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언제나 묵묵하다. 말을 건네지도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며, 누군가 걷기를 기다린다. 누가 스쳐 지나가도 조용히 감당해내며,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는다. 그런 침묵 속에서 길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떤 길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길은 새로운 결심을 이끌어낸다. 또 어떤 길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길을 떠올려 본다. 발 아래 놓인 흙과 자갈의 흔적을 넘어서, 사람 마음 속에 놓이는 또 다른 길을. 길에는 말보다 먼저 시선을 끌고, 설명보다 먼저 삶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길은 방향을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연다. “지나갈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열리고, 멈추어 있던 발걸음이 움직인다. 그것이 길이 가진 조용한 힘이다.

그런 생각을 품은 날, 조용히 삽을 들었다. 흙은 오래 눌려 있었고, 돌들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던 길은 분명히 옆에 있었지만, 그 길은 예배당과 닿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피한 것도, 일부러 멀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익숙한 동선이 자연스럽게 예배당을 비켜간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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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현실이 조용히 마음을 흔들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다른 가능성’을 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길을 내기 시작했다. 누가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예배당을 향해 걷는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면 충분했다. 예배당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게 만드는 몇 걸음의 변화. 그 작은 선을 땅 위에 그어 보았다.

소박한 길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단지 몇 개의 돌을 놓고, 자갈을 정리하고,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들면서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우리가 만드는 건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었다. 이 길을 걷는 누군가가 잠시 예배당을 바라보기를, 예배당의 창문을 통해 하나님을 떠올리기를, 그저 스쳐가는 걸음이 아니라 잠시 멈추는 걸음이 되기를 바랐다.

길은 교회가 세상에 내미는 손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치는 이들에게도 건네는 조용한 인사다. “이곳에 우리가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말을, 우리가 낸 이 길이 대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억지로 붙잡지 않고, 곁에 조용히 서 있는 방식으로 존재를 전하는 길.

길을 내며 공동체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크고 넓고 빠르게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가 걷는 길은 작고, 느리고, 조용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은 한 영혼을 향해 더 가까이 가는 길이고, 한 사람의 시야 안에 하나님의 집이 다시 들어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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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인다. 그 길은 단지 땅 위에 놓인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영혼에게 다가가시기 위한 통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을 닦는 우리의 손길 하나하나가, 사실은 기도이고 섬김이며, 누군가의 삶을 위한 조용한 초대가 된다.
길을 내는 일은 어떤 결과를 기대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길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에게 이미 주어진 사명이었고, 우리 모두가 가야 할 방향이었다. 드러내기보다 섬기고, 설명하기보다 보여주며, 다가가기보다 기다리는 것. 그런 교회의 모습이 이 조용한 길 위에 스며들기를 바랐다.
며칠 전, 동네를 산책하던 한 아주머니가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가벼운 차림에 양손은 비어 있었고, 햇살이 머리칼 끝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예배당 옆을 지날 때 아주머니는 문득 멈추더니, 잠시 고요히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주머니의 마음 어딘가에 하나님이라는 단어 하나쯤 떠올랐기를, 그런 소망이 살며시 피어올랐다. 그 길이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지 않더라도, 마음 어귀를 조용히 스치는 바람이 되기를 바랐다.
지금도 예전 길은 거기에 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익숙한 길을 걷는다. 그러나 가끔씩 새로 낸 길 위를 조심스레 걷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아무 의도 없이 그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그냥 길이 아니다. 하나의 기도였고, 사랑의 방향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공동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묵묵한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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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교회의 크기를 이야기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이는지, 얼마나 크고 웅장한 건물을 가졌는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교회의 크기는, 얼마나 낮아지는가를 통해, 얼마나 먼저 다가가는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낸 이 작은 길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방향과 닿아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중심이 아닌, 그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교회. 그들의 길 위에 조용히 함께 서 있는 교회.
이 길은 단지 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며, 우리의 신앙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의 선이다. 그 위를 걷는 모든 발걸음 위에,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은혜가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은혜가, 교회를 향한 한 걸음이 되어 다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 조용한 길 위에, 언젠가 누군가의 발걸음 하나가 머물기를 바란다. 상처로 말을 잃은 이도, 길을 잃어 두리번거리는 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믿음을 놓친 이도, 어느 날 문득 그 길 가장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게 되기를 바란다. 말 없이 놓인 이 작은 길이, 그 누구에게도 닫히지 않은 여백처럼 남아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교회는, 그 여백을 끝까지 남겨두는 공동체여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다가옴을 미리 가늠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는 그 자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마음을 담은 풍경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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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어느 계절에든, 어느 하루에도,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 어귀에 아주 조용히 닿는 숨결처럼. 그렇게 교회는 기다린다. 걷는 이와 멈춘 이 모두에게 말없이 등을 내주는 길처럼.
작은 교회가 조용히 길을 내고 있다. 바람결처럼 묻어나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그 길을 따라 여전히 한 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또 쓰실 것이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으시되, 누구도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 그 길의 끝에 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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