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눈앞의 이익과 만족을 좇는 길이 있고, 때로는 손해처럼 보이지만 옳고 선한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마음은 종종 즉각적인 만족과 편안함을 주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처음에는 사소하고 무해해 보이지만,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관계가 깨어지고 마음이 메마르며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길은 당장은 쉽지 않고 때로는 나를 부인해야 하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 길 끝에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길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부딪히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합니다(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이유는 방종이나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유를 오해하면 그것은 곧 육체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의 자유는 죄의 억압과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결코 자기중심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 자유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여, 육체의 정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간절히 권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자는 육체의 욕심대로 살지 않습니다(16). 여기서 ‘육체’란 단순히 사람의 물리적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 본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자기중심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된 본성입니다. 성령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 반대되며, 결코 조화를 이루지 않습니다(17).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시지만, 육체의 욕심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의 욕망을 이루려 합니다. 이 두 세력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충돌하기 때문에, 신자는 늘 싸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우리는 육체의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기도와 말씀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할 수 없고, 육체의 욕심과 싸워 이길 힘도 얻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은 열매로 구별됩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경계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입니다(19-21).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데서 비롯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욕심을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성령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삶 속에서 분쟁과 시기, 분열과 미움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며 분명히 경고합니다(21).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행위가 내 안에 자리잡지 않도록 경계하고, 혹시라도 있다면 즉시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22-23). 이 열매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인도하실 때 맺히는 삶의 결과입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적이며, 희락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기쁨이고,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내적 평안입니다. 오래 참음은 사람과 상황을 끝까지 견디는 인내이며, 자비와 양선은 선함과 친절함으로 나타나는 선한 품성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며, 온유는 힘이 있지만 절제하는 부드러움입니다. 절제는 모든 욕망과 감정을 다스리는 절도 있는 삶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단순한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와 역사로 인해 나타나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옛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24). 이는 단회적인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영적 훈련입니다. 정욕과 탐심은 한 번 결단했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서 기회를 노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게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욕망이 올라올 때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그것을 못박고, 부활의 생명으로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길입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의 출발점이 아니라, 신앙 전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기도와 말씀, 그리고 순종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매 순간 성령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 뜻에 맞게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사는 자는 자기를 높이지 않고,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않으며, 겸손과 사랑으로 서로를 세웁니다(26).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혹시 여전히 분쟁, 시기, 분열, 미움과 같은 육체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사랑, 화평, 절제, 충성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신자는 결코 완전하지 않지만, 분명히 변화되어 갑니다. 그 변화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며, 그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영적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 싸움은 쉽지 않지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 순간적인 만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성령의 사람은 그 삶으로 증거하게 됩니다. 그는 말보다 열매로 자신이 누구의 인도를 받는지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것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답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