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선짱님의 댓글
해선짱 작성일
샬롬!! 김해선입니다
♡ 깨달은점
예수님의 흔적은 주님과 함께 한 시간 임을... 우리에게는 자랑할것이 십자가 외에는 없음을 깨닫습니다.
♡ 실천하기
내안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기도합니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말하며(11),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결론적 권면을 전합니다. 여기서 ‘큰 글자’라는 표현은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직접 자기 손으로 또렷하게 기록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서신은 주로 필기 담당자가 받아 적었고, 마지막 인사나 중요한 부분만 발신자가 직접 썼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진리와 경고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긴박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먼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육체적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할례를 받으려는 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합니다(12). ‘육체의 모양’이란 단순한 외형적 특징을 넘어, 종교적 행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뜻합니다. 이들은 할례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자처럼 보이게 하고, 그로 인해 동족 유대인들의 비난과 박해를 피하려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동족을 핍박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회당에서 쫓겨나고, 경제적 불이익과 사회적 단절을 당하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사람들은 고난을 피하려고 율법의 표징인 할례를 받으며, 믿음을 지키는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타협이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바울은 이들의 의도가 결코 순수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의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할례를 강요했습니다(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는 말씀은(12), 그들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기 보호와 자기 영광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여기서 ‘박해를 면하려 함’이라는 표현을 통해, 복음을 붙들면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8:34). 십자가 없는 복음은 없습니다. 고난 없는 제자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조적으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고백합니다(14). 바울의 자랑은 혈통, 학문, 업적, 율법적 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이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패배와 수치의 상징이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였습니다(고전1:18, 24).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 그리고 구속의 완전함이야말로 바울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해 죽었고, 세상도 자신에 대해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세상의 가치와 인정, 안락함에 대해 마음을 닫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만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말하며, 할례와 같은 육체적 모양이 아무 의미 없다고 단언합니다(15). ‘새로 지으심’이란 성령으로 거듭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고후5:17).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좀 더 나아지는 변화가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바뀌는 근본적 변화입니다. 인간의 행위나 표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역사와 성령의 내주로만 가능해집니다. 바울은 이 규례를 지키는 자, 즉 십자가를 자랑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16).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깊은 안정감이며, 긍휼은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와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제 바울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하며(17), 자신의 삶으로 이 메시지의 진정성을 증거합니다. ‘예수의 흔적’이라는 단어는 원래 종이나 노예가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몸에 새기는 표식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매와 채찍, 돌질, 감금, 고난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그 상처를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나타내는 명예로운 표식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업적이나 부, 명예를 자랑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상처를 자랑했습니다. 그 상처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내 삶 속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가?” 예수의 흔적은 단지 육체적인 상처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희생한 시간, 사랑 때문에 감당한 오해와 손해, 하나님 뜻에 순종하느라 포기한 세상의 기회들도 모두 예수의 흔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편안함 속에서만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각오가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바울의 가장 큰 고통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외부의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자신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 복음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목자로서 사랑하는 양떼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마지막까지 권면하고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축도합니다(18). 이 인사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선언입니다. 신앙의 시작과 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은혜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견디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거짓 교훈 대신 복음을 붙들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심령 깊은 곳에 그 은혜가 흘러가기를 기도하며 편지를 마칩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마지막 순간에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도 나에 대하여 죽었느니라. 내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삶 속에 새겨진 크고 작은 예수의 흔적들이,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살아 있는 표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지키며, 평강과 긍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샬롬!! 김해선입니다
♡ 깨달은점
예수님의 흔적은 주님과 함께 한 시간 임을... 우리에게는 자랑할것이 십자가 외에는 없음을 깨닫습니다.
♡ 실천하기
내안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기도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육체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며, 정말 자랑할 것은 주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만든 물건은 오랫동안 사용하며 고장나면 받아들이고 수긍하는데, 저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나의 육체가 고장 날 땐 참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일텐데 말이죠.
묵상: 예수님이 사신것 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적용: 예수의 흔적을 가진 나 오직 주 예수의 은혜가 심령에 가득한 나 십자가만 자랑하는 영적 삶의 길라잡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우리가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의 흔적이 우리 모두의 삶에 가득하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져가고 있음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