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13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이어 온 경우, 은혜와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는 점점 익숙해졌지만 정작 하루의 삶 속에서는 그 복음이 어떤 선택을 낳고 어떤 태도를 빚어내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알고 고백하는 신앙과 실제의 삶에서 책임과 헌신으로 나타나는 믿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격이 생기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차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신앙이 유지되고 있다고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앙은 점점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될 뿐, 살아 내야 할 부르심으로는 인식되지 않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과 삶의 분리가 자연스럽게 굳어져 가고 있음을 우리는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레데 교회의 현실은 말과 삶이 분리된 신앙이 자연스럽게 용인되던 환경이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지만, 삶에서는 그 지식이 아무런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거짓 교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복음을 굳게 붙들어 성도들로 하여금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도록 가르치라고 당부합니다(8). 바울이 강조하는 선한 일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나 종교적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열매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선한 행위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이미 앞서 분명히 선언되었습니다(14).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은혜가 반드시 선한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2:14, 엡 2:9-10).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지만, 값싼 복음으로 소비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를 옛 삶에 그대로 머물게 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나의 삶 속에 구원의 증거들이 실제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은혜라는 이름으로 삶의 변화와 인격의 성숙을 요구하지 않는 느슨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분명한 경계를 제시합니다. 그는 성도들이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명령합니다(9). 이러한 다툼은 진리를 세우지 못하고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릴 뿐 아니라, 결국 아무런 열매도 남기지 못합니다. 앞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11, 13). 복음의 중심에서 벗어난 논쟁은 사람을 지적으로 흥분시키는 듯 보이지만, 영혼을 살리는 능력은 없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에 대해 반복적으로 변론하는 일은 무익하며, 훈계를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고수하는 이단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분명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10).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이 이미 스스로 정죄한 자들이며 부패한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11). 이는 무조건적이며 차가운 배척을 의미하기보다,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단호한 분별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논쟁에 뛰어들어 진리를 지켜낸다는 명분으로 다툼을 반복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은 아니며,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어서 바울은 개인적인 부탁을 전하며 사도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게 되면 디도가 그레데의 사역을 정리하고 니고볼리로 와서 자신과 합류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2). 여기서 우리는 사도의 사역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디도의 사역이 아무리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었을지라도, 그 자리에 머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은 항상 필요한 곳을 향해 나아가야 했고, 하나님의 종은 그 부르심 앞에서 안주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사역의 성과가 곧 사명의 완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사역자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의 삶은 언제든지 이동을 요구받을 수 있으며, 그 이동은 실패가 아니라 순종의 또 다른 형태임을 바울은 조용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세나와 아볼로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를 요청합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서둘러 떠날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게 도와 달라고 부탁합니다(13). 이는 단순한 물질 후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복음 사역은 개인의 헌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공동체의 협력을 통해 완성됩니다. 바울은 그레데의 성도들이 이 일을 통해 복음 사역에 실제로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디도에게 이러한 일이 선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가르쳐, 성도들이 궁핍한 삶에 떨어지지 말고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라고 말합니다(14). 선한 일에 힘쓴다는 것은 눈에 띄는 업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손길과 자원을 기꺼이 내어놓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 말씀은 나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떤 방식으로 돕고 있는지, 그 도움을 부담이 아니라 은혜로 여기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또한 복음의 전진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일에 마음과 삶을 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따뜻한 문안으로 편지를 맺습니다. 그는 같은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디도와 더불어 모든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며, 성도들에게도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합니다(15). 이 짧은 인사 속에는 깊은 목회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동역자들은 결코 경쟁의 대상이 아니며, 비교와 시기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들은 함께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들이며,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섬겨야 할 존재입니다. 복음 사역의 현장은 언제나 넉넉하지 않기에, 동역자 간의 작은 오해와 피로가 쉽게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사랑으로 인사하며, 믿음 안에서의 연합과 신뢰를 소중히 여깁니다.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선한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복음이 나를 통해 드러나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우리를 말 잘하는 신앙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하는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바른 복음을 붙들고 선한 일에 힘쓰며, 쓸데없는 다툼을 멀리하고, 복음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며, 동역자를 사랑으로 품는 삶이 이어질 때, 교회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게 됩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나의 오늘이 다시 정돈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작아 보이는 선한 일에도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을 이어가기를 마음 깊이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