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28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
29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30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 24장 】
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2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5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8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주술사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26).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이처럼 두 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발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발람을 다시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산 꼭대기로 데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고 말합니다(27-28).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발락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정성껏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혹시 마음을 바꾸실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악한 마음을 정성과 풍성한 제물로 감출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고대인들은 정성을 다하면 신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발락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먼저 묻기보다, 나의 정성과 열심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것이라 착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권적으로 이끄시도록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또한 발락은 신탁의 장소를 바꾸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두 번째 제사에서는 이스라엘 진영의 끝만 보이는 비스가 꼭대기로 발람을 데려갔지만(14), 세 번째는 이스라엘의 모든 진영이 자세히 보이는 브올산으로 데려갑니다. 이곳은 바알의 또 다른 근거지이기도 합니다. 신의 영역에 더욱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여타의 우상들과 같은 신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비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대하는 것이며, 결국 우상숭배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발락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나 뜻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와 권세를 유지하려는 악의적 시도였기에 그의 제사는 아무리 정성이 담겨 있다 해도 신앙적인 행위로 볼 수 없습니다.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을 여호와께서 선하게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않고, 그의 얼굴을 광야로 향하여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봅니다(24:1). 그러나 여기서 “선하게 여기심”은 발람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칭찬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발람은 발락의 요구에 따라 두 번째 제사를 드렸고,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발락에게 발람은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26). 다시 말해, 그의 행동은 자신의 뜻이 아니며, 그는 자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내면에는 여전히 발락의 보상과 명예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의지를 꺾으시고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겉과 속이 일치된 순종입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같지만, 내면에 탐심이 남아 있다면 참된 순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이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셨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점술을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점술은 발람의 정체성이자, 세상과의 연결고리였습니다. 발락이 그를 존경한 이유도 점술 때문이었습니다(22:6). 그러나 점술을 포기한 순간, 그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물질적 가치관이나 인간의 욕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진영을 바라보며 발람이 축복할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24:2).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술만 사용하셨지만, 이제는 그의 전인격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이는 발락이 끝까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기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의 뜻을 선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발람의 영적 상태가 충만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상태는 여전히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발람의 세 번째 축복은 그가 보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이스라엘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노라,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노라”고 선언합니다(24:3). 이제 그는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엎드려 눈을 뜬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는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자, 깨닫지 못했던 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변화된 것을 뜻합니다. 발람은 이제 자신의 눈으로 이스라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철저히 무력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입술을 통해, 장차 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강 가의 동산처럼, 물 가의 백향목처럼, 넘치는 물통처럼,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씨가 많은 물 가에 있는 식물처럼 그 수가 번성할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24:5-7).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백성은 사람이 저주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왕성해질 것이며, 들소와 같은 힘을 가지고 주변 대적을 물리칠 것이라고 하십니다(24:8).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이스라엘은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려는 자들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입장이 될 것입니다(24:9).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작정하신 백성을 누가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욕망을 담아 제물을 바치고, 신탁의 장소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과 삶의 중심을 보십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이 결국에는 승리합니다.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좇는 삶은 언뜻 성공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주권적인 손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람처럼 체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