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18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엘가나는 라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어린 사무엘은 실로에 남아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됩니다(11). 이 짧은 기록은 매우 무거운 현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품을 떠난 어린아이가 머물게 된 곳은 거룩함으로 가득한 성소가 아니라, 부패와 타락이 깊숙이 뿌리내린 제사 제도의 한복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젖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스스로 판단할 수도, 자신을 지킬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은 하나님이었으나, 눈에 보이는 환경은 오히려 아이를 위협하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인 홈니와 비느하스는 그 타락의 중심에 있었고, 어린 사무엘은 그 한가운데에 홀로 던져진 듯 보입니다. 이 장면은 사무엘의 앞날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은 곧바로 엘리의 아들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는 평가는 매우 단호합니다(12).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단지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 결과는 제사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로 나타났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끓고 있는 고기에서 제사장 몫을 취하는 규례를 무시하고, 갈고리를 넣어 가장 좋은 부분을 강제로 취하였으며,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생고기를 요구하였습니다(13-15). 이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을 인간의 욕망으로 앞당겨 취한 행위였고, 예배를 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죄악이었습니다. 만일 제사를 드리는 자가 율례대로 행하자고 요청하면, 그들은 오히려 위협하며 억지로 빼앗았습니다(16). 성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었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에 대해 성경은 “그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이라”고 평가합니다(17).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나 개인적 타락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구조적이고 반복적인 죄였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일들이 엘리 제사장의 감독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는 이 모든 일을 모르고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방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홈니와 비느하스의 타락은 곧 엘리의 실패를 고발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죄가 심히 큰” 환경 속에 어린 사무엘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깊은 우려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혀 다른 방향의 증언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자라니라”는 기록은(18), 환경이 아이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앞에 있었지만, 그의 삶의 기준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 앞에 있었습니다. 이는 사무엘을 실제로 붙들고 인도하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은 좋은 제도나 깨끗한 환경이 아니라, 그를 친히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젖을 뗀 아이는 당시 유대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아 약 세 살가량 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한 나이의 아이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는 표현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11). 이는 어린 사무엘이 어떤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의미라기보다, 성소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을 교육하고 돌보았다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곧이어 엘리의 아들들에 대한 혹독한 평가를 제시함으로, 엘리의 교육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12). 그러므로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은, 엘리가 사무엘을 바르게 가르쳤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 앞에서 사무엘을 이미 당신의 종으로 세우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어리지만, 부패한 제사장 가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미 구별된 자였습니다.
홈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행실이 나빴습니다(12). 성경은 분명히 그들을 “제사장들”이라고 부르지만(13), 그 직분이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분이나 지식, 혈통을 따라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뜻 안에 있는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합니다(롬 8:28). 사무엘의 삶은 이 말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 주는 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모습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홈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을 사사로이 취하며, 그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겼습니다(12-15). 반면 한나는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어린 사무엘을 위해 겉옷을 지어다가 주었습니다(19). 사무엘은 어머니가 지어 준 작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습니다(18). 그 옷에는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가 함께 엮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제사장들의 손에는 탐욕이 있었고, 하나님께 드린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손에는 헌신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러한 한나와 엘가나를 보며 하나님께서 사무엘 대신 다른 후사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20). 그 축복은 매우 일상적이고 형식적인 말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엘리는 매년 옷을 지어 오는 한나의 모습을 보며, 나실인으로 드린 아들에 대한 미련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부모로서의 애틋함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축복의 효력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셨으므로”라는 선언이 그 모든 결과의 근원이었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한나는 결국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됩니다(21). 이는 앞서 그녀가 찬양 가운데 고백했던 말씀, 곧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는 선언의 연장이었습니다(10). 하나님께서는 심히 큰 죄악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고, 어린 사무엘을 그 어둠 속에서 지키며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직분이나 환경, 사람의 평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심히 큰 죄악 속에 던져진 어린 아이를 지키시고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의 뜻 안에 있는 자의 발걸음을 여전히 붙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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