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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품, 그리고 하나님 /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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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0건 조회 76회 작성일 26-01-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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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이와 민영이가 감기로 며칠째 고생하고 있다.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기운이 없는데도, 밤이 되면 두 아이는 내 옆으로 파고든다. “아빠 옆에서 잘래.” 엄마보다 아빠 품을 더 찾는다는 사실이 처음엔 고맙다가도,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아이들이 내 팔을 꼭 잡고 숨을 고르는 그 순간, 따뜻해야 할 마음에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 이유를 몰랐다. 그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찾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마음이 스쳤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나? 나도 아빠 품이 그리웠던 걸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날 밤, 아이들 사이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한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 아이들의 체온이 내 팔을 덮고, 그 온기가 천천히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따뜻함보다 먼저 밀려온 것은 오래된 냉기 같은 감정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돌아오며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그건 입술의 고백이었다. 머리로는 ‘용서했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싫었다. 그분의 얼굴을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일었다. 나는 그를 용서한 게 아니라, 그 기억을 덮어둔 채 잊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숨결을 느끼는 그 밤, 하나님이 내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리셨다. 아이들을 꼭 끌어안으며 “나도 이런 품이 그리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났다. 그동안 미움이라고 믿었던 감정의 밑바닥엔 사실 그리움이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는데 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기억, 표현할 줄 몰라 굳어버린 마음, 그것들이 분노의 옷을 입고 내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빠를 미워했던 게 아니라, 아빠의 사랑을 잃은 나 자신을 미워했던 거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도 용서받은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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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도 나처럼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 앞에서 흔들렸을 것이고, 표현이 서툴러서 사랑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분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내 안에 용서를 심으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며 살았지만, 정작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사랑을 떠올리자, 그 사랑이 내 안에서 길을 냈다. 그제야 알았다. 용서란 누군가를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평화를 세우시기 위해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요즘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그리움의 눈물이기도 하고, 후회의 눈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전처럼 아프지 않다. 하나님이 그 상처의 자리를 품으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 이름이 여전히 완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평안하다. 잘했건 못했건, 좋은 추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간에, 그분은 여전히 내 인생의 한 부분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매듭을 천천히 풀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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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내 옆에서 잠들어 있는 지금, 나는 또 한 번 하나님을 배운다.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인 사람. 내가 누군가의 아빠가 된 건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그분의 품을 조금이라도 닮으라는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두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는 품’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두려우면서도 감사하다. 내가 받은 사랑이 아직도 서툴지만, 그 사랑으로 아이들을 품을 수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내게 많은 것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나를 안아주셨고, 그 품 안에서 나는 진짜 아들이 되었다. 이제는 감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아빠…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을 미워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안고 계셨다는 걸.”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신다. 어떤 관계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멀어지지만, 그 거리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나의 미움도, 그분의 침묵도, 결국은 하나님의 기다림이었다. 내가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셨고, 내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계셨다. 오늘 밤, 아이들의 숨결이 고르게 들린다. 그 따뜻한 온기 속에서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 이 아이들이 자라서도 당신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알게 해주세요.”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사랑은 그렇게 배우는 거야 —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신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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