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님의 댓글
건축학개론 작성일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서 있는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약속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율법이 더하여진 이유를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고 말합니다(19). 이 말은 율법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죄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증거하였고(롬3:20),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롬5:20). 율법은 죄를 알게 하지만, 죄에서 구원할 능력은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오직 죄를 비추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진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의롭게 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율법 본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율법이 “중보자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19). 이 말씀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며, 그 기간은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전해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직접 주어졌습니다(20). 바울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주권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주어진 것이며, 율법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 전하신 명령이지만, 약속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은 율법에 의해 무효화되거나 뒤집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초등교사’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자’를 뜻합니다. 고대 로마와 헬라 사회에서 초등교사는 아이를 학교로 데려가고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맡은 종이었습니다. 그는 교육을 직접 맡지 않고,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키고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초등교사라고 한 것은, 율법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이끄는 ‘인도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본래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길을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율법이나 약속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러기에 서로 반대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21),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율법과 약속은 목적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나의 죄를 비추어 회개하게 하는 거울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삼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율법의 기능을 왜곡시켜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를 깎아내리는 일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본래 목적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율법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는 도구여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선포합니다(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롬7:6).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율법의 초등교사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살아갑니다.
바울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26).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신분의 변화는 단순한 법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영적인 변화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27). 세례는 외적인 의식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을 선포하는 표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 의, 성품을 덧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연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포합니다(28).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차별, 신분의 격차, 성별의 구분이 결코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장벽을 허무시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몸이며, 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구주를 모시고, 동일한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았으며, 동일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합니다(29).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혈통적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약속의 기업을 함께 받을 동역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신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과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얽매인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관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연합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율법이 드러내는 죄 앞에서 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서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약속의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유업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서 있는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샬롬! 정수진 입니다.
☆깨달은점
나 혼자만의 믿음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삶으로 살아 가야함을 깨닫습니다.
☆실천하기
나의 기준에 맞추어 비교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이웃이나 교회 공동체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힘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