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23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사무엘상 1장 후반부는 앞선 본문에서 드러난 죄에 무감각한 종교적 현실 위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비옥하였던 에브라임 땅, 하나님의 법궤가 머물던 실로의 장막이 있었던 곳, 절기마다 온 이스라엘이 모여 제사를 드리던 신앙의 중심지에서조차 레위 자손 엘가나의 삶은 습관적인 종교생활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영적 현실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사사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통해 세워진 사울과 다윗의 삶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사울을 통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는 교만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다윗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무너지고 연약한 이스라엘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인간이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스스로의 운명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과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는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냅니다(19).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선하거나 준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없이 연약하고 악하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셨음을 선언합니다. 레위 자손이면서도 불법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두 아내 사이의 갈등과 다툼 속에서 슬픔과 탄식만이 가득하였던 엘가나의 가정에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었습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라는 기록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사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일상적인 동침이 사무엘의 출생을 결정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출생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신’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다는 말은,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계획하시고 이미 실행에 옮기셨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임신과 사무엘의 출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미 정해진 일이었습니다(20).
한나는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며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고 고백합니다. 한나의 고백 속에서 사무엘의 출생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사무엘의 출생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구속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여인의 개인적인 고통과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민족의 미래를 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또한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소견에 옳은 것을 좇아 살기보다, 하나님의 생각하심과 계획하심 앞에 자신을 맡기는 삶이 요구됩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일은 남편 엘가나와 상의되지 않은 일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의 서원을 무효로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결심하려고 경솔하게 입술로 말한 서약은 무효가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민 30:8). 엘가나가 마음만 먹으면, 한나의 서원은 취소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한나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짊어질 이유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아들은 엘가나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라”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23).
이 장면은 하나님의 개입이 한 가정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불신과 갈등이 가득하였던 가정에, 하나님의 뜻 앞에서 포용과 배려가 자리 잡게 됩니다. 사무엘의 출생 이후, 두 아내를 두었던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은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갑니다(21). 매년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를 위해 번제물과 십일조와 거제와 서원제와 낙헌예물, 그리고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준비해야 했습니다(신 12:6). 그러나 그 길에 한나는 동행하지 않습니다(22). 이전에는 브닌나로 인한 갈등이 그녀를 괴롭게 하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분명하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남편 앞에 밝힙니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라는 말은 흔들림 없는 결단의 선언이었습니다(22).
아이가 젖을 뗀 후, 한나는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준비하여 실로로 올라갑니다(24). 준비된 제물은 각기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헌신의 번제, 매년제를 위한 제물, 그리고 서원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때 아이가 아직 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엘가나와 한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 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결단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생각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계획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19).
한나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다시 한 번 맹세하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립니다(25).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경배합니다(27-28).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욥 역시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욥 1:2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잃었던 것의 갑절을 주셨고, 한나에게도 세 아들과 두 딸을 허락하셨습니다(2:21).
슬픔과 원통함으로 가득하였던 한 여인의 인생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들이 없던 여인은 사무엘뿐 아니라 많은 자녀를 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고통 속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19). 오늘의 삶을 고통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은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는 이 고백은,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일하심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