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님의 댓글
정현 작성일
샬롬.
깨달은 점
---)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귀하게 여김. 그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실천하기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더 열심히 나의 시간을 사용하겠습니다. 무엇을 해내는 시간이 아닌 오롯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겠습니다.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 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엘리의 죄를 두고 “그가 아는 죄”라고 선언하셨습니다(3:13).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2:29). 요약하면,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긴 죄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본래 깊고 깊어서, 그 사랑 자체만으로 정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하나님을 밀어내고, 거룩을 지키라는 직분을 마비시키며, 죄를 죄로 다루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그 순간, 사랑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길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은 개인의 일탈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지도자의 죄는 공동체의 죄가 되며, 성소에서 시작된 부패는 백성의 영혼까지 무디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탄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사 1:4). 엘리의 죄는 아들들의 죄를 못 본 체한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으로서 백성을 지도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도 계속 그 자리에 서도록 방치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죄의 습관 속으로 미끄러져 가도록 내버려둔 죄였습니다. 죄로 인한 타락의 시작점에는 지도자의 방임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겨오게 하고, 그 과정에 제사장들이 동행한 사건은 공동체 전체를 위험 속으로 끌고 들어간 선택이었습니다. 실로에는 엘리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대제사장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이 비뚤어진 흐름을 멈추게 할 마지막 책임을 감당했어야 합니다. 물론 그는 아들들에게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고 말하며 책망하기도 했습니다(2:24). 그러나 그 책망은 거룩을 회복시키는 단호함이라기보다, 소문으로 인한 체면의 손상을 염려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사랑의 실체임을 말합니다(요일 5:2). 자녀를 향한 사랑은 죄를 덮는 사랑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내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물을 강제로 취하고, 성막 문에서 여인들과 동침한 사실은 분명 개인의 탐욕과 정욕이 빚은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제사장의 옷을 입은 자들에게서 반복되었다는 사실은, 백성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무감각을 배우게 했습니다. “제사장도 그러한데 우리가 이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이 공동체 전체의 양심을 무디게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그들의 문제”로만 분리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을 떠올리게 됩니다. 욥은 자녀들이 잔치를 마치면 혹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을까 두려워하여, 아침에 일어나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리는 일을 습관처럼 행했습니다(욥 1:5).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경은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라고 기록합니다(욥 1:20). 그의 찢음과 엎드림은 슬픔의 몸짓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는 회개의 자리였고, 예배로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예배는 정보를 얻는 시간이 아니라 관계를 세우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예배가 먼저 무너진 사람은, 문제의 본질을 붙잡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이유를 찾게 됩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가 습관이 되고 공동체가 병들어 가는 동안에도, 하나님 앞에서 찢고 엎드리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블레셋과의 전쟁을 통하여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한 심판을 시작으로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을 드러내십니다. 그날, 전쟁터에서 한 베냐민 사람이 달려와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덮어쓴 채 실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엘리에게 전쟁의 결과를 고합니다. 이스라엘이 패하였고, 많은 백성이 죽었으며,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먼저 보여주는 장면이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옷을 찢고 티끌을 뒤집어써야 할 사람은 제사장 엘리인데, 정작 그렇게 한 사람은 이름도 크게 부각되지 않는 “어떤 베냐민 사람”입니다. 이는 제사장 직분이 겉모양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무너져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엘리는 소식을 기다리며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13). 그는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마음이 떨려 그리하였다고 기록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그 두려움이 회개의 자리로 이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엘리는 자기 자리에 앉아 소식을 기다렸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과 집안을 돌아보는 자리에는 서지 못했습니다. 소식이 전해집니다. 백성이 도망했고, 큰 패배가 있었고, 두 아들이 죽었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이 이어지는 순간,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기록합니다(18). 이 표현은 외모를 조롱하려는 말이 아니라, 심판의 윤곽을 분명히 그려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2:29). 그의 비대함은 체질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을 팔아 사적 이익을 키운 결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목이 부러져 죽는 장면은, 이스라엘 지도자의 굽은 목이 끝내 꺾이는 심판처럼 보입니다.
그날의 심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이며 엘리의 며느리였던 여인이 이 소식을 듣고 해산하게 되며, 산고 끝에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 힘을 다해 붙드는 것은 남겨질 아들의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고,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합니다(21). 그리고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밝히며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합니다(22).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라의 흥망이나 집안의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에서 영광이 떠났다는 탄식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이스라엘의 깊은 병을 한 문장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하나의 부적으로 여기며 전쟁에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언약궤의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회개와 예배의 회복이었습니다. 형식은 남아 있어도 영광이 떠날 수 있습니다(22). 제사장이 있어도 거룩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외형의 종교가 성소를 채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곳은 이미 텅 빈 곳이 됩니다. 이가봇이라는 이름은 한 가정의 비극이면서도, 한 시대의 진단서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았습니까. 블레셋의 칼이 마지막을 만들었으나, 그 칼을 부른 길은 죄의 길이었습니다. 아들의 죄가 아버지의 죄가 되고, 아버지의 방임이 자녀의 죄를 키우며, 지도자의 무기력이 공동체의 양심을 무너뜨립니다. “내버려두라”는 말로 죄를 방치하는 순간, 부모는 자녀를 살리는 손이 아니라, 자녀를 죽음 쪽으로 밀어내는 손이 되기 쉽습니다. 자녀를 살리는 길은 자녀를 향한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회복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자녀가 사는 길이며, 가정이 먼저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다음 세대가 다시 일어서는 길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결코 무질서하지 않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에 대하여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고 경고하셨고,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것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1-34). 그 말씀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었고, 훗날 엘리 계통의 제사장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에서 쫓겨날 때, 성경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고 증언합니다(왕상 2:27).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잊지 않으시며, 거룩을 멸시하는 종교를 오래도록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심판 속에서도 자기 영광을 다시 세우실 길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영적 책임을 누구도 대신 져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자녀의 문제를 말로 다루기 전에,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배가 먼저 회복되어야 하고, 회개가 먼저 깊어져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다시 가정의 공기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시대에, 죽어가던 여인의 탄식이 우리 귀에 다시 들려야 합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그 말 앞에서, 우리는 형식의 종교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22).
샬롬.
깨달은 점
---)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귀하게 여김. 그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실천하기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더 열심히 나의 시간을 사용하겠습니다. 무엇을 해내는 시간이 아닌 오롯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