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이야기

지문 / 안병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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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8회 작성일 25-04-2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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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주름 속에 잠긴 날들 

층층이 쌓여  패각처럼 붙은 손톱 밑에

오래전에 바다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소리없이 뺨을 타고 가슴에 고인 물결

남모르게 닦아내었을 손가락 끝엔

온 몸을 휘감던 바다의 흔적이

딱딱한 돌기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차갑게 굳어졌던 동태의 지느러미가 

갯내음에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밥상 위에 올려 진 국그릇 속에

소금 뿌려가며 휘휘 소용돌이 만들던

어머니 손가락

지워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아픔이

그릇마다 짠내음으로 묻어나던 때 

그때부터 내 손가락 끝에도 돌기가 생겼을까

울컥, 가슴으로 바닷물이 밀려온다.


 『詩. 지문』 전문

 

물결이 밀려오듯, 오래전의 쓴 한 편의 시가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가 천국가신 후, 다시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고 낯설게 아프다. 어머니가 이 땅에 계실 때, 어머니의 주름진 손끝과 손톱 밑에 스며 있던 인생의 흔적을 바라보며 써 내려간 글이었다. 그 지문 끝에서 번져 나온 바다의 기억은, 오래된 조개껍데기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 층층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어머니의 손끝에 남아 있던 패각의 단단한 흔적은 노동으로 인해 생긴 상처 같았지만, 그 안에는 말없이 견딘 세월과, 참아온 마음들이 겹겹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사랑으로 버무려진 인내와 희생의 형상이었다. 시를 쓸 당시엔 그저 삶의 고단함을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깊이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 손끝에 새겨져 있던 삶의 흔적은 어머니가 걸어온 생의 바다였고, 한 세대가 신음하며 건너온 광야였다.

밥상 앞, 국그릇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손이 떠오른다. 특별한 날도, 평범한 날도 아닌, 언제나처럼 조용히 앉아 국을 휘젓던 어머니. 그 손끝이 국물 속에서 소용돌이를 그리며, 내 삶 속에 하나씩 따뜻함을 녹여 넣고 계셨다. 지금은 그때의 일이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가며 희미해지고 있다. 눈물은 더 이상 뺨을 타고 흐르지 않는다. 마음속에서만, 소리 없이 고여 갈 뿐이다.

나는 시를 다시 읽으며 성경 속의 한 여인을 떠올린다. 룻기의 나오미.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삶의 모든 기둥이 무너진 자리에서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그녀. 자신을 ‘마라(쓰다)’라 불러달라고 말했던 그 마음속에는, 말없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으리라(룻 1:20). 그리고 떨리는 손끝마다, 살아낸 세월의 단단한 껍질이 덧씌워져 있었을 것이다. 고통은 흔적을 남기고, 사랑은 그 흔적을 끝내 껴안는다.

어머니의 손가락 끝에 박여 있던 돌기들도 고된 시간 속에서 스며든 염려와 기도의 응어리였다. 밥상 위 국그릇마다 배어 있던 짠내는, 눈물로 끓여낸 사랑의 향기였다. 어머니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눈물은 곧 염려가 되고, 염려는 다시 기도가 되어야 했기에, 그녀는 울음을 삼킨 채 국을 휘젓고 또 휘저었을 것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는 말씀처럼, 어머니는 인생의 모든 무게를 사랑으로 감당하셨다. 그분의 국 한 그릇 안에는, 자녀를 향한 깊은 염려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간구가 함께 담겨 있었다. 손끝으로 저어낸 국물은 음식 그 이상이었다. 하늘 앞에 올려드린 기도의 흔적이었다.

이제 나는 아내가 차려낸 밥상 앞에 앉는다. 국그릇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어머니의 손길이 내 곁에 있는 듯 느껴진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수많은 순간마다, 어머니의 흔적은 잔잔한 파도처럼 마음을 적시고 지나간다. 그 국물 속에 담긴 사랑은 내가 시로 표현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더없이 거룩했다. 그 사랑은 어머니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사랑의 방식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눈을 감으면 주님의 은혜가 느껴진다. 손바닥에 못 자국이 선명한 그 손. 고통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나를 살리신 은혜의 증표였다(요 20:27). 어머니 손끝에 남아 있던 굳은 흔적처럼, 주님의 손바닥에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 손으로 붙들림을 받았고, 지금도 그 손으로 돌봄을 받고 있다. 어머니는 그러한 주님의 손길처럼, 말없이 자식들을 감싸 안고 살아오셨다.

사랑은 종종, 울컥임으로 돌아온다. 시의 마지막 줄처럼, “울컥, 가슴으로 바닷물이 밀려온다.” 그 울컥함은 후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된 사랑이 다시금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바닷물이 밀려오듯,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게 가슴을 적신다. 말로 다 갚을 수 없는 사랑, 설명할 수 없는 은혜가 말없이 내 안에 머문다. 어머니의 손끝에 남아 있던 바다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였다.

오늘도 짠내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밥상 앞에 앉아 삶을 추스르며, 짠 국물을 마시며 다시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그 짠맛 속에 스며든 사랑 때문이다. 삶은 소금물처럼 쓰고 아리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결코 사랑을 잊지 않게 하신다.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살리고, 다시 걷게 하신다.

바다는 고요한 날보다, 파도가 치는 날 더 깊이 기억된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바다를 본 나처럼, 오늘도 나는 주님의 못 자국에서 은혜의 바다를 본다. 그 바다는 결코 마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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