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15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우리가 애굽에 오래 거주하였더니 애굽인이 우리 조상들과 우리를 학대하였으므로
16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에 있사오니
17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우리가 큰길로만 지나가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낼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지나갈 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하나
20 그는 이르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
21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22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르시되
24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25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29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더라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에돔의 땅과 모압을 가로질러 요단강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좀 더 빠른 방법으로 요단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남북을 관통하는 에돔의 '왕의 대로'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사신을 보내어 에돔 왕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먼저 에돔과 이스라엘은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합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신광야와 인접한 가나안의 남쪽 지역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오랫동안 학대를 받으며 노예생활을 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동정심을 자아내기도 합니다(14-16).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시고 인도하여 내셨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외면할 경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전합니다(16).
그러나 그것만으로 에돔 왕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모세는 사신을 통해 에돔이 왕의 대로를 열어주면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며, 물을 마시면 그 값을 내겠다고 약속합니다(17). 모세는 왕의 대로를 통해 가능한 요단강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 모든 외교적 수단을 사용하는 한편, 에돔 왕에게 동정심을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을 비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된 여정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이 에돔으로 가로질러 가지 못하고 우회하는 길로 행하게 된다면 많은 희생을 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간청하듯 동정을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키며 가능한 왕의 대로로 지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은 신앙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신앙을 지키는 일이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말이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귀 기울여야 함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에돔을 향한 모세의 요청이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전쟁을 하고 빼앗고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장 빠른 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먼저 깨달아야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혈기와 분노는 이미 수십 년 전에 건널 수 있었던 요단강을 묘연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심지어 그 땅을 정탐까지 하고도 원망과 반역으로 인해 다시 광야로 내몰려야 했던 이스라엘과 모세는 다시 가데스로 돌아와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를 육체적인 눈으로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대상이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육체의 눈으로 볼 때 묘연한 길 같고, 세상의 길은 가장 빠른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길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신뢰하며, 다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지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그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모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에돔 왕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심지어 만일 에돔 땅을 지나가려고 한다면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선포하고, 실제로 에돔 왕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영토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섭니다(18-21). 모세의 말과 같이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이고, 자신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을 것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적으로 간주하고 막아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않고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모세에게 그 어떤 길도 형통하게 열리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내 눈에 “곧 되는 일”,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지푸라기 하나도 누릴 수 없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에돔 왕이 이스라엘의 길을 막아선 것으로 보이지만, 약속의 땅은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빨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느린 것 같지만, 인내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결국, 에돔으로 지나가지 못한 이스라엘은 가데스를 떠나 우회하여 호르 산에 이르게 됩니다(22). 이스라엘이 우회한 것은 군사력이 에돔에 비하여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속에게 세일 산을 중심으로 한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고(창36:1-9), 기업으로 주신 형제의 땅을 탐하거나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신2:4). 비록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이었지만 이스라엘과 모세는 순종의 길을 택하였고, 전쟁보다는 평화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다시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24). 이는 결국 아론의 죽음이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작은 불순종이라도 그 책임은 가볍지 않으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론은 호르 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그의 직분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넘겨짐으로써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백성들은 삼십 일 동안이나 애곡했습니다(29). 아론의 죽음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위임은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과 섭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인하게 합니다.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아론도 피해가지 못하는 불순종의 결과인 죽음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과 원망의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은 모세도 아론도 미리암도 아닌 하나님 한 분뿐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세는 회중이 보는 앞에서 호르 산에 올라 아론이 입었던 대제사장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힙니다(28). 아론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큰 상실감을 안겨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회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으로서 위임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인 약속의 성취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또한, 이는 에돔과 같은 그 어떤 족속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미리암의 죽음에 이어 모세와 아론의 불순종, 그리고 아론의 죽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시며 순종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