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에젤님의 댓글
엘리에젤 작성일항상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원망하며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 백성들의 앞길을 막고 가나안 땅 입성의 당위성을 주장한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고 탄식하시며, 그들의 원망하는 말을 들었기에 그 말대로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26-28).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진노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며, 실제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그 심판을 이루실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게 하는 무거운 말씀이었습니다(39).
또한 이스라엘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원망하며 불평하였습니다(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셨고, 그 말한 대로 반드시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혀를 선하게 사용해야 했지만, 오히려 함부로 말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라고 말한 악인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시12:4). 그들의 말은 결국 자신들을 겨누는 화살이 되어 되돌아왔고,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시64:3). 다윗이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라고 했듯이(시140:3), 이스라엘의 말은 스스로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자녀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고통을 겪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세우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고후5:10). 우리는 패역한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밀히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한 대로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29).
물론 그들이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죽기를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두려움에 휩싸인 자들의 불평이자 원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순종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곧 불평과 불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뱉은 말은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되어 현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대상을 “나를 원망한 자 전부”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29).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먼저 시작했든 나중에 동조했든,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게 심판받게 됩니다. 원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며, 공동체의 거룩을 해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죄악의 씨앗을 뿌린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뿌린 원망과 불신의 결과를 스스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광야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그 죄의 대가를 직접 경험하게 하십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단지 유배가 아니라, 회개와 자각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의 시간입니다(30).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중 나를 원망한 자”로 한정하십니다. 곧,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 이십 세 미만의 자녀들에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약속을 신뢰하였기에 그 땅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십 세 미만의 자녀들에게까지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이유는 단순히 민족 보존을 위한 전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 한 사람으로도 민족을 새롭게 세우실 수 있는 분이며,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그들을 ‘유아’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31). 이들은 아직 미성숙하여 말과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연소함이 죄에 대한 면책이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33). 여기서 ‘반역’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길을 따르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불신앙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자녀들 역시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의 죄를 자녀에게 그대로 전가하는 형벌이 아닙니다. 자녀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영향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훈련하시고 믿음을 세우시려는 뜻을 가지셨습니다.
그 방황의 시간은 단지 유예나 연기가 아닌,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시간이며, 그 속에서 믿음의 성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그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34). 이는 징계의 기간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 행위에 근거해 정해졌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변개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라 하였고(삼상15:29), 야고보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약1:17).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과 패역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징계에 대하여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3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지키시며, 인간의 죄악 앞에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광야는 안식과 평안이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한 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한 자들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광야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 앞에 우리는 마땅히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우리의 소망도 오직 주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항상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 이정현이예요.
깨달은 점---)
여전히 눈에 보이는 시선과
들리는 목소리를
하나님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욱 두려워하는 내가 있습니다.
실천하기---)
나의 작은 실수라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매일 아이들과 나누는 말 한마디. 눈빛 한조각도 조심스럽게 나누기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때론 내가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내 존재 안에 두려움 때문에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내 스스로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불신과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