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묵상

(금) 요나 4:1-11 /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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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남교회
댓글 4건 조회 111회 작성일 25-10-31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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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거두셨습니다(3:10). 그러나 요나는 이를 보고도 크게 불쾌히 여기며 성을 냈습니다(1).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실제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을 그는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도덕적 판단과 민족적 감정에 어긋난다고 여겨 분노했습니다. 요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니느웨로 보내실 때부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성읍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다시스로 도망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았으나, 그 긍휼이 앗수르 사람들에게만큼은 결코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요나는 강한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공의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정의는 사회의 질서를 세우고 법과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최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공동체와 역사의 한복판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정의감으로는 불타 있었으나,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 의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을 기뻐하기보다 불편해했습니다.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판단과 감정을 하나님의 의보다 높이는 인간의 연약함을 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니느웨를 구원하셨지만,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더 큰 주제는 사람의 끊임없는 불순종 속에서도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불순종하는 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간청하기를,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 하였습니다(3). 이것은 절망의 고백이 아니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앗수르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을 보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항변이었습니다. 니느웨 전역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며 금식하였는데도, 요나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나가 풍랑 속에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 했던 말이(1:12),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순종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을 택해서라도 불순종하겠다는 완강한 태도였음을 드러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 같은 시간을 겪고도, 그는 여전히 니느웨의 구원이 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집요한 자기주장과 완강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곧바로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않으시고, 질문으로 그의 마음을 비추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가 과연 정당한지를 돌아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4).

요나는 니느웨 성을 하루만 돌고는 성을 떠나 동쪽에 앉아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고 성의 운명을 지켜보려 했습니다(5).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가 함께 회개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 밖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결과를 관망했습니다. 이 모습은 “나는 너희와 다르다, 너희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요나의 교만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니느웨 수많은 영혼의 운명에는 무관심했지만, 자신의 육체적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막을 지을 줄 아는 모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만든 초막은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을 만들어 요나를 시원하게 하셨습니다. 뜻하지 않은 그늘에 요나는 크게 기뻐했습니다(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예비하셔서 이튿날 새벽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보내어 요나가 다시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7-8). 그 순간 요나는 또다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며 불평했습니다(8). 하나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9).

요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9).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스스로 고백했던 자가(1:9),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조차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시든 박넝쿨의 상실에는 큰 분노를 표하면서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나 있는 큰 성읍의 구원에는 무관심했습니다(11).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재배도 아니한 박넝쿨도 아꼈거든, 하물며 내가 어찌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0-11). 하나님은 일시적이고 하찮은 것에도 인간이 집착하는 모습을 지적하시며, 생명의 가치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요나를 책망하셨습니다.

박넝쿨 사건은 요나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요나는 자신의 몸 하나 편안하게 하는 그늘에는 민감했지만, 수많은 영혼의 구원에는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가르치십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한 영혼이라도 아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역이란 내 감정과 판단으로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물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의에 충만하여 이웃을 판단하고, 내 정의감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정한 경계 너머까지 흘러갑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오늘도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원수에게도 임해야 하고, 우리가 누린 긍휼이 그들에게도 흘러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나는 성 밖 그늘에서 결과를 지켜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성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회개와 회복이 일어나는 자리,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요나의 순종조차 사용하시되, 동시에 요나를 다루어 온전한 믿음을 세우셨습니다. 니느웨의 구원은 요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동시에 그 구원 사건은 요나를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물음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1).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와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품을 때,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감정과 의를 내려놓고, 주의 공의와 긍휼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사역과 삶 속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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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건축학개론님의 댓글

건축학개론 작성일

묵상: 요나서 1장에서 3장까지는 니느웨 사람들을 위하여 쓰였지만 요나서 4장은 요나 한 사람을 위하여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 한 사람을 니느웨 백성의 무게만큼 귀하게 대하십니다. 요나 한 사람의 각성으로 니느웨 민족에게 영향을 미칩니다.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한 영혼이 은혜를 받으면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강남교회님의 댓글의 댓글

강남교회 작성일

나의 즐거움과 의지처가 잠시 사라졌음을 괴로워하며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우리의 모습,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손해나도, 조금만 불편해도 그럴때에는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보다 그러한 것들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무지입니다.

민스님의 댓글

민스 작성일

샬롬♡
이옥희 권사입니다
♡ 깨달은 점
사람의 불순종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삶속에서 온전히 주의 공의와 긍휼을 붙들고 살아야함을 깨닫습니다.
♡ 실천하기
 하루하루 내 뜻이 아닌 아버지께 묻고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강남교회님의 댓글의 댓글

강남교회 작성일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적나라한 요나의 거친표현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일까요? 앞선 그의 고백을 보면 요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절감입니다. 명령대로 순종했으나 자신의 마음에는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했던 요나의 마음은 말씀대로 한 것 같지만,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가 순종했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만의 변명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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