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께서 요단에서 행하신 일을 듣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1). 요단 강물이 끊어져 마른 땅을 건너게 하신 사건은 이스라엘이 강을 건넜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 백성을 친히 인도하신 사건이었고, 모든 대적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보다 앞서가셔서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여시며, 대적들의 전의를 꺾으시고, 이미 승리를 보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단순히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싸우시고 이기신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대적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은 그들의 내면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뜻합니다. 전쟁에서 마음이 꺾인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듯,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실 때 모든 대적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위협과 장애물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무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 됨이 증거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2). 이는 매우 중요한 명령이었으나 동시에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위험한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행하는 동안 그들은 군사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이 기습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는 전쟁의 승패가 무기의 많고 적음이나 군사의 강하고 약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가 승리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첫 세대는 할례를 받았으나, 광야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4-5).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표징을 새롭게 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이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간다는 표징이며,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내는 언약의 징표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언약 백성으로 세우시고, 그 땅을 차지할 권리를 언약 안에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9). 애굽의 수치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과거의 신분, 곧 죄와 억압 아래 놓였던 과거를 가리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약에서 바울이 “너희는 죄의 종이 아니요, 의의 종”이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롬 6:18).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존재의 정체성이 바뀌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은 세상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언약의 공동체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할례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그 순종은 단순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드려지는 고백이었습니다(3). 광야에서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던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후손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언약의 약속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설명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 진을 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10).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직후,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과거의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하며, 앞으로의 모든 삶 속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유월절이 끝나자 이스라엘은 그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땅의 소산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약속뿐만 아니라 육적인 필요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단순히 영혼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를 아우르는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광야의 나그네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쳤습니다(11). 만나의 중단은 하나님께서 이제 광야의 삶을 마무리하시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은 이제 가나안 땅의 소산으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급 방식이 바뀐 것이지, 하나님의 공급 자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채우시는 분입니다. 다만 그 방식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일구며 그 소산을 먹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성숙한 자리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어린아이처럼 돌보실 때가 있고, 어른으로 세우셔서 스스로 책임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만나가 그쳤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라고 기록합니다(12).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상황은 결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전쟁 상황에서 씨를 뿌리고 추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이 존재하는 한복판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땅의 소산을 먹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셨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평안을 주셔서 생업을 이어가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가나안에서는 땅의 소산으로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방법을 바꾸실지라도,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대적들 가운데서도 담대함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생명과 삶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아버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