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6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7 그의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
8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9 누가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면 그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일곱째 날에 밀 것이며
10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 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11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말미암아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그 날에 그의 머리를 성결하게 할 것이며
12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 년 된 숫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물로 드릴지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때에 그의 몸을 더럽혔은즉 지나간 기간은 무효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실인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 앞에 일정 기간 동안 거룩히 구별되어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을 말하며, 이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도였습니다(1). 이처럼 나실인의 서원에는 성별의 차이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는 남성이 종교적, 사회적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거룩한 삶에 있어서는 남녀 차별 없이 누구나 동일하게 주님께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거룩함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과 개인의 신앙적 결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특별한 결심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히 드리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레위인처럼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신 제도였습니다.
나실인의 삶은 구별된 삶이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 형식이나 일시적 감정이 아닌, 실제적인 삶의 방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뿐 아니라, 포도 자체를 포함한 일체의 포도나무 소산을 금하였고(3-4), 머리를 자르지 않고(5), 어떤 경우에도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음으로써(6),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제한하고 절제하며 드리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자는 세상의 모든 쾌락과 문화, 관계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며, 거룩함은 곧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소속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선교나 자원봉사와 같은 특정 기간을 헌신하며 사는 것과도 깊이 연결되는 삶의 형태입니다.
포도나무 소산을 멀리하는 규례는 단순히 음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즐거움과 쾌락의 상징을 멀리함으로써 나실인이 지향해야 할 영적인 방향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포도는 가나안 땅의 풍요와 기쁨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타락과 방종의 상징으로도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전도자는 포도주를 생명의 기쁨으로 언급하였고(전10:19), 예수님께서도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지만(요2:1-11), 반면 노아는 포도주로 인해 수치를 드러냈으며(창9:21), 이사야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포도주에 취해 옆걸음치는 자들로 묘사하였습니다(사28:7). 이처럼 포도주는 양면성을 지닌 상징으로서, 나실인에게는 세속적 방종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의 자세를 상기시키는 금지 항목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도 세상의 유익과 편안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자신을 절제하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삭도를 대지 않고 머리를 길게 자라는 것은 외적인 구별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긴다는 신앙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머리는 곧 권위와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심을 언급하며(고전11:3-7), 머리를 가린다는 것은 영광을 가린 것이라 하였습니다. 반대로 머리를 민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해 영광을 잃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에게 머리를 뜯으며 통곡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한 바 있습니다(사22:12). 따라서 머리를 자르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헌신을, 머리를 미는 것은 그 거룩함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외적 표현이었습니다.
나실인의 규례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는 명령입니다. 이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자는 죽음을 상징하는 그 어떤 것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부모나 형제자매가 죽었다 해도 나실인은 시체에 손을 대거나 장례 절차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7). 이는 인간의 정서적 아픔보다 더 우선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명령이며, 나실인의 정체성이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그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에,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군가 갑자기 곁에서 죽어서 나실인의 머리가 더럽혀졌다면, 그는 일곱째 날에 머리를 밀고 정결함을 회복하며,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에 나아가 제사장에게 드려야 했습니다(10). 제사장은 그 중 하나를 속죄제로, 하나를 번제로 드림으로써 부정함을 속하고, 머리를 다시 성결하게 한 후(11), 속건제물로 숫양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결단을 포함한 회복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나실인은 이전의 서원을 무효로 하고,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서원을 정해야 했습니다(12). 이는 이전의 헌신이 부정함으로 인해 무효화되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은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결단임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절차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전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회복의 길을 열어주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에 언제든지 실수하거나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고 새롭게 서원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헌신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태도입니다. 이처럼 나실인의 삶은 단순히 율법적인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드리는 헌신의 삶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는 제도적 나실인이 아닌, 영적인 나실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쾌락, 방종을 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한 기간, 특별한 헌신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도 귀하지만, 일상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의 삶은 일회적인 헌신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새롭게 드리는 반복적 결단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의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이 얼마나 소중하며, 또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께 속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도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소망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나실인의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