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님의 댓글
정현 작성일
깨달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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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뜻안에서 서로 나누는 사랑은.
베품도 감사와 기쁨이고.
나누어 받는것도 감사와 기쁨입니다.
공동체안에서의 관계의 가장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실천하기----)
항상 감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습니다.
22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25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27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고의적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의도성'입니다. 성경은 이를 ‘악의’라고 표현합니다(22). 돌을 던지거나 사람을 밀쳤다 하더라도, 악의가 없었고 상대가 있는 줄 모르고 한 일이라면, 설령 그 결과로 사람이 죽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22-25). 이는 고의성 여부가 살인을 판단하는 결정적 기준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 대한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 없이 부지중에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이웃과 함께 삼림에 들어가 도끼로 나무를 찍을 때 자루가 빠져 이웃을 맞춰 죽게 한 것이라. 이런 자는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그가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않으나, 두렵건대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그를 따라잡아 죽일까 하노라”(신 19:4-6).
이 말씀은 단순히 사고로 인한 죽음의 사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도와 마음을 기준으로 판단하신다는 분명한 원칙을 세우셨습니다. 원한도 없고 해할 의도 없이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경우, 비록 결과는 고의적 살인과 같더라도 동기가 없었다면 그 생명은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을 통해 결과만 보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오해하거나 억울한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억울한 자의 사정을 아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은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라고 노래하며 공의로운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시 72:4). 억울함을 만들지 않는 것, 내 이익만을 앞세우지 않고 타인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작은 걸음입니다. 또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내면의 의도와 악의를 정확히 분별하기 전에는 함부로 정죄하거나 악인이라 낙인찍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단지 결과가 아닌, 마음의 동기를 기준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회중은 살인의 고의성 여부를 신중히 판단해야 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라면, 회중은 피의 보복자에게서 그를 구해내어 도피성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25). 도피성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일정한 제한이 따르는 장소였습니다. 도피성에 들어간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곳에서 거주해야 했습니다. 만약 그 전에 도피성 밖으로 나왔다가 피의 보복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 피 흘림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도록 하셨습니다(25-27). 이는 죄가 완전히 사해지기까지는 반드시 대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공간이었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라도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피할 길이 마련된 곳이며, 그 안에 머무는 것은 곧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생명을 잃은 자로 간주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전합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함을 받은 자들이며, 그 은혜 안에 거할 때에만 생명이 보장됩니다. 은혜를 떠날 때 우리는 생명을 잃은 자와 같게 됩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은 때로 내 삶이 제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율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듯한 답답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이며, 죄에 대한 대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 도피성 밖을 나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살 수 없습니다. 피의 보복자가 살인자를 죽였을 때 그 책임이 본인에게 돌아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자의 멸망도 본인의 책임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마침이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세움받았던 것처럼, 대제사장의 죽음은 새로운 삶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다시 시작되는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죄와 함께 묻히고, 새로운 생명을 입는 이 놀라운 전환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피성 제도를 단순한 응급 조치가 아닌, 대대로 판결의 기준으로 삼도록 명하셨습니다(29). 생명은 고의든 비고의든 매우 엄중히 다뤄야 했고, 특히 고의적 살인은 반드시 확실한 증거와 정당한 절차에 따라 판단되어야 했습니다.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인에 대한 오판과 억울한 희생을 막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30).
살인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31). 생명이 돈으로 대체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돈이라도 한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죄를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면, 가진 자는 면죄부를 사고, 없는 자는 죽임을 당하는 불의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공의를 철저히 막으셨고, 공평한 기준 아래 생명과 죄, 벌과 은혜가 다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을 떠나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가는 일 또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32). 이는 죄에 대한 대속은 반드시 정해진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야 하며, 인간적인 조건이나 계산으로 우회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돈으로 죄를 덮고 법을 피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죄로 간주됩니다. 재물이나 권력에 의지하여 정의를 왜곡하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에게 있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오직 하나님의 기준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을 엄격히 다루시고 도피성 제도를 마련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거할 땅은 생명의 땅이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피로 더럽히는 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훼손하는 것이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생명에 대한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죄의 결과이기에(롬 6:23),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땅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 또한 하나님의 거처이며,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삶 속의 불의와 악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피는 피로서만 속함을 얻고 정결해지며, 하나님은 죄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 안에서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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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뜻안에서 서로 나누는 사랑은.
베품도 감사와 기쁨이고.
나누어 받는것도 감사와 기쁨입니다.
공동체안에서의 관계의 가장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실천하기----)
항상 감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습니다.
도피성 제도를 바라보며 중요한 관점 중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죄인이 도피성에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살게 하신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받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만이 안전할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의 관계 중심은 곧 사랑입니다." 좋은 묵상입니다. 사랑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으로 표현됩니다.